평화가득하소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선교지역 소식

평화가득하소서 선교지역 소식
2025년 04월 제37호-은총과 평화 가득한 세계 성지순례 ⑭새롭고도 오래된 곳, 팔도 성당의 기억

작성자: 천주교서울국제선교회

등록일: 2025-04-18 조회수: 46

파일첨부 :

은총과 평화 가득한 세계 성지순례 ⑭


새롭고도 오래된 곳, 팔도 성당의 기억


김원창 미카엘


얼마 전 성지순례 준비를 위해 찾은 모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아주 특별한 책 한 권을 보게 되었습니다. ‘LUDIMENTA LINGUAE LATINAE (허창덕 지음)’. ‘초급 라틴어’라는 제목의 이 책은 39년 전 제가 라틴어를 처음 배웠을 때 교재로 썼던 책입니다. 저의 라틴어 교수님은 저자이신 허창덕(치로) 신부님이셨습니다. 만주 용정 출신이신 신부님은 1945년에 사제품을 받고 간도(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거주 지역을 일컫습니다)의 중심 성당인 ‘팔도 성당’ 보좌 신부로 첫 사목생활을 시작하셨고, 1948년부터 1992년 선종하실 때까지 신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학생에게 교수 신부님은 하늘과 같은 존재입니다만, 특히나 허 신부님의 존재감은 다른 어느 교수 신부님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제아무리 강심장이라 자신하는 학생도 허 신부님 앞에 서면 눈을 마주보지도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신부님의 라틴어 수업은 저희 모두에게 공포의 시간이었던지라, 저희의 지상 목표는 두 시간 내내 신부님의 질문을 한 번도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예외인 학생들이 있었는데, 바로 수녀님들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유독 수녀님들에게는 말투부터 부드럽게 대하셨고, 저희가 입 밖으로 냈다간 대번에 불호령이 떨어질 오답을 들으셔도 빙그레 웃기만 하셨습니다. 자연히 다른 학생들은 이런 차별대우에 신부님을 꽤나 원망하기도 했고, 농담 삼아 ‘수녀복을 입고 수업을 들어야 하나?’라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에는 피치 못할 사연이 있었는데, 오래전 신부님께서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수녀님을 빤히 쳐다보시면서 질문을 던졌을 때 그렇지 않아도 신부님을 무서워하던 수녀님께서 그만 그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 버리셨답니다. 그 후로 신부님은 딱 수녀님들에게만 아주 너그러운 선생님이 되셨다는 이야기가 저희에게 전설처럼 내려왔습니다.


무시무시했던 수업시간의 추억과 함께, 마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어딘지 고독하게 성큼성큼 내딛으시던 허 신부님의 발걸음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 신부님의 기억은 저에게, 중국과의 갈등으로 몇 년 동안 가지 못한 연변과 간도 지역 순례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지역은 허창덕 신부님의 고향이자 교회의 아픈 역사가 새겨진 곳입니다. 용정출신으로 덕원 신학교에서 공부하신 허 신부님의 첫사목지는 ‘팔도(八道, 당시에는 ‘조양하朝陽河’라고도 했습니다)’ 성당이었습니다. 팔도 성당은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인 ‘연길시’에서 약 30㎞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간도에서 가장 활발했던 중요한 성당이었습니다. 1903년 10여 가구의 신자들이 간도 땅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찾아내서 마을을 이루면서 시작된 팔도 성당은 1908년에는 교우수가 1,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초가 10칸을 지어 공소로 사용하고, 또 다른 초가 8칸을 지어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교리실로 사용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당으로 승격되어, 1917년에는 종탑을 갖춘 큰 성당을 완성했고, 신자수는 무려 2,300명을 넘어섰습니다. 본당 내에 학교와 진료소 그리고 유치원까지 운영하는 등 간도 지역에서 보기 드문 굴지의 본당으로 성장한 팔도 성당에서 처음 성체거동을 행했을 때, 간도의 전 지역에서 신자들이 모여들어 행렬에 참여한 신자 수가 5,0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간도의 로마’라는 별칭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던 팔도 성당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 큰 시련을 맞이합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그날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간도 지역에서도 일본군이 물러나며 간도는 소련군의 점령지가 됩니다. 며칠 후, 소련군이 팔도 성당 사제관에 난입해 수녀님들을 보호하려던 독일 수사님 한 분을 총으로 사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는 이후 간도 지역의 모든 교회 공동체가 겪어야 할 지난한 박해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 뒤로1946년 초에 이르기까지 간도 지역의 모든 성당은 문을 닫아야 했고, 소련군의 박해는 사제와 수도자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뻗치기 시작합니다. 성당 묘지에 묻혔던 시신을 파내 강물에 던져 버리는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지고, 연길지목구장 주교를 비롯하여 모든 사제와 수도자는 연길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가 백두산 아래 마을로 이주시켜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당시 팔도 성당에는 본당신부인 왕 레지날도 신부님과 막 사제품을 받고 보좌로 임명받은 허창덕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소련군에게 붙잡힌 두 신부님은 감옥에 끌려가는 대신 성당에서 인민재판을 받았습니다. 제단과 모든 성물이 산산조각 난 성전 안에서 두 분은 기절할 때까지 각목으로 매질을 당하고, 깨어나면 다시 매질이 시작되는 모진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만신창이가 된 두 분을 새끼줄에 묶어 마을을 돌게 하며 조롱을 받도록 하는 ‘조리돌림’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반쯤 죽음에 이른 두 사제는 길거리에 내팽개쳐졌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소련군은 숨만 붙어 있던 두 분을 끝장내지 않았고, 시체처럼 버려져 죽어가던 그분들을 구조해 극진한 간호 끝에 목숨을 지켜낸 이들은 바로 눈물을 삼키며 그분들의 수모와 고통을 지켜보았던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들은 더 이상 팔도에 머무르실 수 없었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신부님들이 살아난 것을 알게 된 소련군은 왕 신부님을 1946년 겨울에 본국으로 추방하였습니다. 그리고 허 신부님께서는 관리들의 눈을 피해 홀로 부산까지 머나먼 도피의 길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이토록 끔찍한 기억이 허 신부님의 몸과 마음에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어 새겨져 있었을지 저는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신부님과 마주해 대화를 나눌 수 있던 학생 때 이 이야기를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참으로 큽니다.



하지만 팔도 성당의 시련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66년 중국 전역에서 끓어오른 문화혁명의 불길은 간도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고, 팔도 성당은 가장 먼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폐허가 된 팔도 성당은 1976년 혁명이 끝나고, 중국 사회 전반에 자유의 바람이 미약하게나마 돌아오던 시기에 작게나마 공소성당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 성탄절에는 공소에서 미사가 봉헌되었고, 독일 베네딕도 수도회의 도움을 받아 1992년에는 지금의 성당이 들어서게 됩니다. 비록 한 때 화려하고 웅장하게 서 있던 고딕성당 대신 콘크리트와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어진 작은 건물이 자리해 있을 뿐이지만,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선 그 작은 성당은 간도 지역 신자들에겐 혹독한 박해와 탄압에도 꺾이지 않고 다시 피어난 신앙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연변 지역에서 배출된 조선족 사제 6명 중 4명이 이곳에서 났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교우촌인 팔도 성당을 순례하는 마음은, 그 길고 긴 시련의 역사를 되새길 때마다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연길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팔도 성당을 순례할 때면 가장 먼저 뵙게 되는 분이 있습니다. 순례단이 온다는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나와 기다리시는 공소회장님이십니다. 성당 바로 아랫집에 사시는 회장님께서는 이 지역의 다른 많은 신자분과 마찬가지로 팔도 성당의 역사를 온전히 함께하신 분이십니다. 이곳에 신앙의 자유가 꽃피었던 시절의 충만한 기쁨을 가슴에 품고 모진 박해와 고난의 시기를 묵묵히 견디신 끝에, 삶의 마지막 시간에 다시 찾아온 신앙의 자유를 온전한 은총으로 누리며 사시는 회장님께는 혹독한 박해의 시기에도 이곳을 떠나지 못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1966년 8월, 문화혁명의 불길은 가장 먼저 종교시설, 그중에서도 특히 성당을 먼저 파괴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희생양은 말씀드렸듯 팔도 성당이었습니다. 용정에 사는 젊은 공산당 청년들이 팔도 성당을 부수기 위해 찾아왔고, 천만다행으로 하루 전날 그 소식을 알게 된 당시 주임신부님(중국인 유 베드로 신부)께서는 한밤중에 황급히 가장 귀중한 물건만을 챙겨 산 중턱 큰 나무 아래 파묻으셨습니다. 신부님이 지키신 것은 미사경본, 성작과 성합, 성석(聖石), 그리고 세례대장이었습니다. 성석이란 성인 성녀나 순교자의 유해를 넣은 돌판입니다. 과거에는 성전 안에서든 밖에서든 반드시 제대 위에 성석을 놓고 그 위에서 미사를 봉헌해야만 했습니다. 성당 밖에서 미사를 거행할 때에는 성석을 휴대용 제대로 사용해서, 선교지역의 사제들도 가벼운 성석을 갖고 다니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 크기는 성반‚ 성작‚ 성합을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여야 했습니다.



성당이 파괴되고 10년의 시간 동안 유 신부님께서는 온갖 고초를 겪으시며 삼엄한 감시 아래 사셔야 했습니다. 당연히 성물을 숨겨 놓은 산 중턱에는 가볼 수도 없었고요. 이 시간 동안 혹여 이 성물들이 훼손되진 않았는지 매일 지켜보셨던 분이 바로 지금의 공소회장님이십니다. 물론 공산당원들은 회장님께서 교회의 주요인물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신부님과 마찬가지로 감시를 늦추지 않았고, 당연히 회장님도 성물을 묻어 놓은 곳에는 가까이 가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은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 내십니다.


회장님께서는 신부님께서 성물을 묻은 산 중턱이 가장 잘 보이는 곳, 바로 그 건너편 산에 자리 잡고 10년 동안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산허리에 있는 험지를 개간하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사실은 매일 반대편 산 중턱의 큰 나무 아래 묻힌 성물을 지키며 사셨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곳에 성물이 묻힌 것을 모른다 할지라도, 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라도 생길 일을 염려하여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을 바라보며 살아오신 겁니다. 10년의 시간이 지나 다시 신앙의 자유가 찾아왔을 때, 회장님께서는 가장 먼저 그곳으로 달려가 숨겨둔 성물을 파셨다고 합니다. 그 성물들 중 일부는 지금도 팔도 성당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회장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시는 성물은 바로 성석입니다. 10년 동안 지켜온 보물을 꺼내어 보여주시는 회장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하지만 10여 년 전, 회장님의 환한 얼굴을 기대하고 찾아온 팔도 성당 입구에는 회장님이 아닌 다른 자매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자매님은 회장님께서 연로하신 데다가 병까지 앓게 되셔서 움직이지 못하신 지 며칠 되셨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팔도 성당을 순례한 후 순례단에게 회장님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일정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다 함께 병문안 가는 것을 청했습니다. 신부님을 비롯해서 순례단 전원은 기쁜 마음으로 찬성해 주셨고, 회장님의 가족들도 순례단을 환영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30여 명의 순례단은 회장님 집 툇마루에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바쳤고, 신부님께서는 그분의 머리에 손을 얹고 정성스레 강복해 주셨습니다. 이미 말씀 한마디 하실 수 없는 상태셨지만, 그때의 회장님 얼굴은 제가 본 중에 가장 환하고 평화로우셨습니다. 저희를 위해 과일을 내어주신 자매님께서는 한국에서 찾아온 순례단의 기도를 절대 잊지 않으실 거라, 또 회장님께서도 저희 기도에 함께하셨으리라 믿는다 말씀하셨습니다. 회장님의 아들 신부님께서도 며칠 전에 병문안을 오셔서 상태를 보시고는 종부성사(병자성사)를 주셨다 하시면서요. 그리고 순례를 마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저는 회장님께서 마침내 하느님 품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비록 중국의 국적을 가졌으나, 간도에는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누고 또 같은 신앙을 나눈 분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오래되었지만 또한 새로운 팔도 성당입니다. 선교사제들의 땀과 피가 배어 있는 땅 위에 신자들의 눈물과 기도로 세워진 그곳을 여러분과 함께 찾아갈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전글 2025년 04월 제37호-선교회 및 후원회 소식
다음글 2025년 04월 제37호--신학생 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