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에서
그리스도인의 기쁨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이용우 요한 베르크만 신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대한 믿음이며, 기쁜 소식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그리스도시라 하더라도, 그분이 나쁜 소식이나 슬픈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셨다면, 누가 그분을 믿거나 섬기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기쁨은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근본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메시지이고, 하여 주 예수님의 기쁜 소식에 대한 우리의 응답 또한 당연히 기쁜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기쁜 소식”이 나에게 당장은 희생과 손해를 넘어서 죽음을 가져올지라도 말입니다. 주님의 생애와 수난,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본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이 결코 이 세상에 한해서만이 아닌, 저 멀리 영원을 지향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그러한 “기쁜 소식”에 대한 우리의 “기쁜 믿음” 역시 저 멀리 영원을 지향할 때에야 비로소 그 기쁨이 열매를 맺고 완성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기쁜 소식”에 대한 진정한 “기쁜 믿음”을 온몸으로 보여준 이들은 바로 우리나라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발각되면 온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초극단의 상황에 직면해서도, 우리의 순교 선조들은 설령 가족을 배반할지라도 하느님과 진리를 결코 배신할 수 없다며 오히려 “기쁘게” 순교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묵상함에 있어 순교자들의 기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돈 많이 벌어서 기뻐하는 이들이 있겠지요. 자신이나 가족이 출세해서 기뻐하는 이들이 많겠지요. 아파트나 주식 투자에 대박 나서 기뻐하는 이들이 또 없겠습니까? 그 와중에, 손해를 보고도 기뻐하는 이들이 있고, 희생을 하고도 기뻐하는 이들이 있고, 복음 때문에 죽음을 맞으면서도 기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바로 참그리스도인들입니다.
특히나, 한국 천주교회 역사의 첫 1세기 동안 스물여섯 분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몰래 들어와, 그분들 중에서 스물두 분이 순교하셨습니다. 순교하지 못한 네 분 중에서 두 분은 병환으로 돌아가셨고, 두 분은 박해시대 말기에 추방당하셨습니다. 그 두 분 가운데 한 분은, 순교하려고 했는데 추방당해 너무 억울해서, 강제 추방된 후 자진 재입국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스물여섯 분의 프랑스 선교사들 가운데에는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자마자 그 어린 나이에 조선으로 파견된 이들도 많고, 또 조선 땅에 몰래 “기어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한 지 5년 내에 순교하신 이들도 여럿입니다. 선교회 소속은 아니었지만 선교회에 의해 선발되고 교육받고 사제품을 받은 우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대표적인 경우지요? 순교 당시 스물여섯 살, 서품된 지 1년 만입니다. 그분의 편지들을 읽어보면,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스물한 번째 서한)면서, 복음적 죽음의 기쁨을 넘어선 위엄 가득한 순교의 환희까지 엿보입니다.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를 알리기 위해 천사 가브리엘이 그녀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먼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고 인사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고, 교회의 모델입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받는 기쁨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적 기쁨이자 우리 전 교회의 모델적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남자를 안 적이 없는 처녀에게 잉태를 예고하는 게 “기쁜 소식”일까요? 그 잉태로 인해 유다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건데, 천사는 기뻐하라고 인사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fiat: 루카 1,38)라는 순명의 응답으로 그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기쁜 소식을 기쁜 믿음으로 받아들인 마리아에게, 첫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예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손해의 기쁜 소식을 희생의 기쁜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영원한 환희의 영광이 주어진다는 진리를 마리아의 모범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고 설파하신 지 2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재물의 힘은 2천 년의 세월을 동시대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하느님보다는 재물의 힘을 믿고 받들고 기대어 살아가는 이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재물”이란 단어는 본래 신약성경의 원어인 그리스어에서 ‘재물의 신’을 뜻하는 맘몬(Mammon)입니다. 21세기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누가 기쁨을 줍니까? 하느님입니까? 재물의 신입니까? 사도 성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로마 7,22)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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