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과 평화 가득한 세계 성지순례 ⑫
스위스의 대표적 성모 성지 ‘아인지델른’ 천 년 간 이어진 Salve Regina
김원창 미카엘
올해 여름은 정말 견디기 어려울 만큼 더웠습니다. 불볕더위가 계속되면서 “기상청이 생긴 이래 이런 더위는 없었다”라는 기상 뉴스를 매일 들었던 여름이었습니다. ‘아침에 갑자기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 온도계를 봤더니 30도밖에 안 되더라’는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올여름이 우리의 남은 생애 중에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지도 모른다는 아찔한 뉴스나 급격한 기후변화의 수레바퀴를 멈추는 것은 이미 늦었다는 기후학자들의 경고도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환경운동에 오랫동안 헌신하며 다른 이들보다 앞서 기후변화를 걱정하던 후배는 여러 해 동안 에어컨 사용을 자제했는데, 이번 여름에는 견딜 수 없어 자연스럽게 에어컨 리모컨을 찾게 되었다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순례 중에 방문하게 되는 알프스의 만년설이 점점 없어져 가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며 기후 변화에 무던했던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자연을 보전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갈 길을 찾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의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이번 호에는 스위스 알프스 자락에 세워진 아름다운 수도원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나라건 성모님과 관련된 대표적 성지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고, 이러한 성모 성지는 특별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성모 성지인 ‘루르드’와 스페인의 ‘사라고사’는 성모님의 발현 장소이고, 터키의 ‘에페소’와 이탈리아의 ‘로레토’는 2,000년 전 성모님께서 직접 사셨던 집과 관련된 성지입니다. 다른 나라에도 특별한 이야기를 품은 중요한 성모 성지들이 있고요. 그런데 스위스의 대표적 성모 성지인 ‘아인지델른’은 성모 발현이나 성모님의 생애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이곳에 모셔진 검은 성모상은 꽤 유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스위스의 대표적인 성모 성지가 된 것도 아니고요.
아인지델른은 스위스의 한 지방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고 이곳에 세워진 수도원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독일어로 아인지들러(einsiedler)는 수도자라는 의미입니다. 아인지델른은 이 단어에서 파생되어 ‘수도자들의 장소’ 또는 ‘수도원’이라는 뜻이 있죠. 단어가 가진 뜻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아인지델른은 수도원이 세워진 후에 수도원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이름을 가진 마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100년 전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아주 외딴 장소였습니다.
취리히 호수 근처, 아인지델른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장소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곳 수도원에는 로텐베르크 출신의 사제 마인라트(St. Meinrad)라는 수도사제가 있었는데, 늘 고독한 삶에 대한 갈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수도원 장상의 허락을 받아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에첼’에서 은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침묵을 통해 경건한 은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성인의 명성은 금방 널리 알려졌고 주위 사람들은 성인을 찾아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홀로 있을 때는 철저한 침묵을 지켰지만,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훌륭한 조언자였던 성인의 명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높아졌고요.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은수처를 방문하며 은수 생활에 집중할 수 없었던 성인은 더 조용하고 외딴곳을 찾아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곳이 바로 아인지델른입니다. 물론 성인의 통찰력 있고 겸손한 조언을 얻기 위해 먼 길을 재촉하며 이곳까지 찾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861년 1월, 몹시 추운 겨울에 두 사람이 성인의 은수처를 방문했습니다. 이들은 은수처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헛된 소문을 들은 강도였습니다. 성인은 만나는 순간부터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챘지만, 친절하게 대했고 따뜻한 음식도 내주었습니다. 그리고서 권면의 말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눈치챈 성인을 죽였고, 취리히로 도망갔습니다. 그때 성인과 함께 지내던 까마귀가 그들을 쫓았고, 까마귀가 두 사람을 계속 쫓아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강도들을 붙잡았습니다. 두 강도는 법정에서 성인을 살해한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죠. 성인의 유해는 처음 수도 생활을 시작했던 라이체나우(Reichenau)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성인의 은수처를 중심으로 수도원이 세워진 후에 수도원으로 이장되어 모셔져 있습니다.
수도원이 세워지고 마을이 형성된 지 천 년이 지난 아인지델른은 15,000명의 인구가 사는 도시가 되었고, 여러 번의 개축을 통해 수도원의 규모도 커졌습니다. 긴 시간 동안 여러 번의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아인지델른의 수도자이자 사제였던 츠빙글리(Ulrich Zwingli)는 1519년 스위스에서는 처음으로 가톨릭을 반대하며 종교 분열을 일으켰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수도원의 입회자가 급격히 줄어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스위스를 대표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된 이곳은 스위스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손꼽히는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도서관도 매우 유명한데, 9세기 때의 교회 서적들을 비롯하여 총 23만여 권의 장서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레고리오 성가 필사본 악보는 이 도서관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음악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필독서라 할 수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 121번 악보는 보물 중의 보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름답고 화려한 대성당도, 안뜰을 4개나 보유하고 있는 수도원 회랑도, 엄청난 가치가 있는 악보나 필사본도 수도원 성당 입구에 자리한 작은 “은총의 경당”의 중요성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장소는 성 마인라트의 은수처가 있었던 곳으로 성인께서 소중히 여기던 검은 성모상도 모셔져 있었습니다. 지금의 성모상은 500년 전에 화재로 소실된 원래의 성모상 대신 500년쯤 전에 새로 제작된 것이죠. 검은 성모상과 어울리게 경당을 둘러싼 외벽도 검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 작은 경당이 바로 스위스 최대의 성모 성지입니다.
제가 순례 동반자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성모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특별한 이야기가 담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인지델른은 조금 달랐습니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왜 이곳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성모 성지가 되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치유가 있었고 기적이 일어났지만, 스위스의 다른 곳에서도 그런 곳은 또 있습니다. 또한 아인지델른의 검은 성모상이 유명하고 아주 흔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둘러보면 아인지델른에만 있는 매우 희귀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참피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수많은 시간 동안 촛불에 그을러 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이곳만의 고유한 이야기도 아니고요. 그런데 왜 이 은총의 경당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성모 성지가 되었을까요? 저는 세 번째 방문했을 때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인지델른 베네딕도 수도원 대성당에서는 매일 오후 4시 30분에 Vesper(저녁기도)가 있습니다. 다른 수도원에 비해 조금 이른 시간입니다. 저녁 혹은 황혼을 뜻하는 단어인 vesper는 교회 용어로 저녁기도를 뜻합니다. 아무리 알프스 자락에 있는 수도원이지만 오후 4시 30분은 다소 이른 시간이죠. 그런데 이 저녁기도는 수도자들뿐 아니라 순례자를 포함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기도 시간입니다. 약 25분 정도 걸리는 저녁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이죠. 어느 수도원이든 보통은 한 장소에서 저녁 기도가 시작되고 마무리까지 됩니다. 그런데 이 수도원에서는 기도를 마친 후에 수도자와 평신도 모두가 성당 입구 쪽에 있는 은총의 경당으로 행렬해서 검은 성모상 주위에 둘러섭니다. 그리고 수백 년 간 그곳에서만 전승되어 온 고유 음률에 맞춰 성모찬가를 노래합니다. 생각해 보면 저녁 기도를 마친 후에 성모찬가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득 루카 복음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
문득 저는 은총의 경당에 모셔진 검은 성모상과 그 주위를 장식한 검은 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이곳이 왜 중요한 성모 성지인지 말입니다. 이곳은 성 마인라트께서 순교하시고 수도원이 세워진 이래 1,000년이 넘게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그 시간에 같은 기도가 봉헌된 곳입니다. 그래서 그 세월의 거룩함으로 인해 경건한 경당을 이루고 있는 주변의 검은 돌도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거룩함이 쌓여 그 공간에 가득했습니다. 비록 성모 발현지도 아니고, 성모님의 유물이 모셔진 곳이 아니어도 그곳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성모님과 함께 수도자와 신자들의 기도가 쌓이고 또 쌓여 거룩한 장소가 된 곳이었던 것이죠.
누구나 마음먹으면 하루를 거룩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때로는 한 달을 그렇게 살 수도 있고요. 하지만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일 년을 거룩하게 살기는 어렵습니다. 십 년은 더욱 그러하고요. 그런데 이 작은 “은총의 경당”에서는 천 년 동안 매일 똑같은 시간에 “Salve Regina”가 울려 퍼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지금 불리는 성모찬가는 16세기경에 작곡되어 보존된 것이지만, 그 이전에는 또 다른 성모찬가가 매일 같은 시간에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렸을 것입니다. 14세기부터 유럽에서 중요한 순례지였던 이곳은 오늘날에도 꾸준히 순례자들이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수사님들과 함께 기도하는 순례하는 이들의 거룩함이, 이곳을 더욱 거룩한 성모 성지로 만듭니다.
처음 한두 번 아인지델른을 방문했을 때는 수도원 앞 광장이 수도원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을 나누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세 번째 방문했을 때, 지도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 중에 거룩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그 구분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원 앞 광장은 영적인 공간과 세속의 공간을 하나로 엮고 있는 중심축이었습니다. 혹시 스위스를 여행하실 기회가 있으시다면,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아인지델른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거룩함이 쌓이면 그 어느 곳이든 성지가 될 수 있다는 경험을 하시게 될 테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모든 공간을 성지로 만드는 힘도 얻게 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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